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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간지각능력 때문에 국제 미아 신세를 모면한 사연

수다공작소 2010. 6. 20. 23:46

다른 건 형편 없지만 유독 공간지각능력이 높은 편입니다. 고등학교 때 실시한 적성검사에서 공간지각능력이 99%로 나왔습니다. 최근에는 네이버 붐 두뇌게임을 재미삼아 해봤는데 다른 건 완전 젬병이어도 역시 이 능력 하나만의 썩지 않았는지 상위 1%에 속했습니다.

 미아가 될 뻔 하다 

어렸을 때 친적집에 갔다가 길을 잃어버린 적이 있었습니다. 당시 6살이었고, 아파트 단지는 난생 처음이었습니다. 몇 백 몇 호조차도 익숙하지 않은 상태에서 그것도 죄다 복사한 듯 일렬로 서 있는 아파트에서 길을 찾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천성인지 아니면 뚝심인지는 모르겠는데, 스스로 길을 찾으려는 의지가 무척 강합니다. 프랑스 파리에서도 상젤리제역에서 에펠탑까지 걸어갔었습니다. 솔직히 말하면 어설픈 불어실력 때문에 좀 주눅이 들어있었던 건 사실입니다. 

우선 왔던 길을 되짚어보았습니다. 최대한 기억이 나는대로 거슬러 올라가봤는데 낯선 이의 집이었습니다. 가지고 있는 단서라고는 2층이었다는 것 뿐이여서 정말 쉽지 않은 미션이었습니다.

 동경에서 길을 잃다 

일본 동경에서도 길을 잃어버린 적이 있습니다. 몇 번이고 왔다갔다했던 길이라 이젠 잘 기억하고 있겠지하고 단순하게 생각했던 게 화근이었습니다. 동경은 정말 미로 같은 곳입니다. 이곳이 저곳 같고, 또 저곳이 이곳 같은, 또 워낙 골목이 많고, 막다른 골목도 많아서 발품팔이는 꽤 해야 하는 동네였습니다.

눈물이 나기 시작했습니다. 도저히 친척집은 나오지 않았습니다. 거의 자포자기할 시점이었는데 현관문에서 아는 이가 나오지 않겠습니까?

일본의 경우는 정말 난감 그 자체였습니다. 탁월한 근성 따위를 싸그리 짓밟아버리는 난해한 길들 또 워낙 어둑어둑해서 걷는 것조차 무서웠습니다. 밀애를 즐기는 연인들, 생 양아치처럼 보이는 건들남들까지 일본의 밤은 조용하면서도 할 건 다하는 그런 시간이었습니다.

휴대폰도 없고, 내가 오지 않아 걱정할 사람들을 생각하니 덜컥 겁이 났습니다. 이 한몸이야 어찌 됐건 고생하면 낙이 오는데(과정이야 어찌됐건 길을 찾아내는) 행여나 내게 뭔 일이 생긴 건 아닌지 걱정하실 식구들에게 미안했습니다.

 파리는 역시 관광도시

파리는 역시 최고의 관광지다운 포스를 풍겼습니다. 길을 잃어버릴래야 잃어버린 수 없는 완벽에 가까운 지도들이 도로 곳곳에 설치되어 있었습니다. 또 검지손가락만한 에펠탑이 멀리서나마 언제나 함께 해줘서 안심이 됐습니다. 빅터휴고거리를 따라 쭉 걸어서 콩코드 익스프레스까지 걸어가 그곳 근처에서 지하철을 탔습니다. 다른 지하철역은 다들 무인시스템이라 난감했는데, 이곳에는 인포메이션 부스가 있어서 왕복을 생각하고 두 장의 표를 구입했습니다. 일단 샹제리제로 가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는데, 당최 어디서 지하철을 타야할지 몰랐습니다.

될대로 되라는 식으로 지하철에 올랐습니다. 앞에 아이들과 함께 탄 부부가 있어 볼펜으로 지하철노선표의 샹제리제를 가리키니 5번 후에 도착하다고 합니다. 나름 불어를 쓰는 나라에서 1년을 넘게 살았는데, 어쩜 그리도 말이 안 떨어지던지요. 역시나 세계만국 공통어는 바디랭귀지인가 봅니다.

샹제리제에 도착했습니다. 검지만하던 에펠탑도 이젠 팔뚝만큼 커 보였습니다. 저 멀리 무슨 박물관이 멋드러지게 보이고, 저 앞에는 궁전 같은 게 큰 광장을 끼고 펼쳐져 있습니다. 근데 솔직히 실망이었습니다. 제가 은근 기대했던 건 명품거리였거든요. 나중에 알고 보니 속으로 들어가야 그 거리를 만날 수 있다고 하네요. 암튼 이리저리 카메라 셔터를 눌러가며 이 짧은 여정에 대한 최대한의 보상을 해주고 있었습니다.

에펠탑에 이르기 전에 참 신기한 건물을 보게 됐습니다. 건물 벽면이 온통 식물로 덥힌 건물이었는데, 어머니께서 제가 찍은 사진을 보시더니 방소에도 나왔다고 하네요. 아무튼 역시나 범상찮은 동네구나 싶었습니다.

에펠탑은 정말 으리으리했습니다. 물론 건축물도 으리으리했지만 에펠탑에 오르기 위해 줄을 선 인파가 더 으리으리해보였습니다. 한쪽 기둥은 폐쇄된 상태였고, 다른 쪽 세 기둥에 정말 거짓말 하나 안 보태고 100미터도 넘는 줄이 세 갈래도 나눠어있었습니다.

돈도 돈이지만 시간도 시간인지라 에펠탑에 오르지 못했지만 사전 준비도 없이 혼자서 이리도 잘 돌아다니는구나 싶어 내심 스스로가 대견스러웠습니다. 사실 제가 코뼈골절 때문에 파리에 갔거든요.

새틴느낌의 광택이 흐르는 검은색 수트에 시답잖은 워킹을 자랑하면 파리를 누볐으니 여행 이상의 자유와 낭만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기념품으로 7유로짜리 금사로 에펠탑을 수놓은 누가봐도 싸구려틱한 블랙 나이롱가방을 사왔습니다.(급후회ㅡ,.ㅡ;; 너무 비싼 거지)

일본에서도, 파리에서도, 그리고 유년시절에서도 저는 당당하게 모르면 모르는대로 걸어갔습니다. 어찌보면 공간지각능력 때문에 덕 본 사연이라기 보다는 무수히 많은 경우의 수(이 길 가보고, 아니면 저 길 가보는, 때론 재수 없어 왔던 길 또 가서 가슴을 쓰러내리는)를 견뎌내는 묻지 못 할 똥고집 덕이라고 볼 수 있겠네요.

여하튼 결론은 공간지각이능력이 탁월해 뭐든 눈떼중을 하려든다는 겁니다. 이왕이면 물어보는 게 훨씬 시간 절약이 되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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